기억

2006/04/04

Categories: personal

아마 이 맘 때였을 것이다. 2년 전 봄, 싱그런 봄바람이 불어오고 부대의 분위기는 점점 나른해지고 있었다. 내 육군 동기들 혹은 후임병들은 전역을 하고 있었고, 나는 어느덧 부대내 최고참이 되었다. 나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간부들 밖에 없었고, 나는 전역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인화 작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려 동료들과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참 좋았고-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말년병장의 입가에는 어느덧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부대 밖으로 보이는 강남의 고층빌딩들과 대법원의 웅장한 모습에 바깥 세상을 향한 동경, 기대는 여전했다.

문득 군기근무가 검정색 모자를 눌러쓰고 식당에 있음을 인식했을 때에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다행히 군기근무자는 같은 소속 김중사였고, 나는 나름대로 말년이라는 위치와 평소의 행실에 자신이 있었기에 거침없이 식당으로 들어가려했다. 그러나 김중사는 날 불러 세웠고 인식표(소위 군번줄) 미착용과 두발 불량으로 적발했다. 군번줄 미착용은 그렇다치고 두발 불량은 정말 의외였다.

원래 같은 소속의 병사들은 적발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거니와 오히려 다른 소속 근무자에게 적발된 병사들을 구제하는 관행이 있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무척 못마땅했지만 설마 ‘상부 보고하진 않겠지 단순 경고였을거야’ 라는 생각을 하며 애써 자신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한달 뒤 군기 교육 대상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한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전역이 몇일 남았는데..군기교육? 웃기시네!’ 그러나 나에겐 군기 교육을 불참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있었고, 나는 불참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김중사를 향한 알 수 없는 미움의 감정이 싹텃다. 그러나 밤중에 연등 독서실에서 말씀 묵상을 하다가 눈이 번쩍 띄였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로마서13:1)

사실 내가 불평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 과오를 소리 없이 묵과 할 수 있는 지위가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냥 안가면 끝이고 몇일 뒤 전역하면 되었다. 김중사를 다시 만날 일도 없거니와 불참석에 대한 차후 불이익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 교만함이었다.

이미 한껏 높아진 알량한 말년 병장의 특혜를 알게 모르게 이용하고 있었고 모범병사라는 소리를 들으며 적당주의로 모든 업무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 매너리즘에 하나님께서는 일격을 가한 것이다.

나는 군기교육을 하루종일 받았고, 무척 고된 시간이었다. 훈련소, 유격훈련의 ‘선착순 x명’이라는 뼈아픈 고통을 다시금 경험하며 사점도 몇번 느꼈다. 점심시간 내무실에 잠깐 들어와 쉴때도 오후에 나가야 할까 하는 갈등이 끊임없이 존재했다. 그러나 권세에 순종하고 교만을 낮추라는 주님의 목소리가 다시금 메아리 쳤다.

‘권세에 복종. 교만의 제거!’ 교육 받는 내내 머리 속에 메아리 쳤던 가르침 이었다.

후에 김중사를 다시 만났을때 본인도 내가 참석했다는데에 흠짓 놀랐던 것 같다. 몇일 뒤 전역 인사를 하러 갔을 때에 내 미래에 행운을 빈다며 격려해주셨는데 이 기억이 꽤 오래 갈 것 같다.

썩어들어가던 은밀한 권력의 안일함을 제거하신 주님께 감사. 무엇보다 13장 1절의 말씀을 주신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