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2006/03/18

요즘 참 행복하다. 무엇보다 한살한살 나이를 먹어가며 이전에 가졌던 헛된 야망과 그릇된 사상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기쁘다. 항상 하나님께서 날 보살피고 계시다는 강렬한 믿음과 그의 인도하심이 초월적이라는 생각이 때때로 내 삶 전체를 휩쌓을 때가 있다. 그의 생각 너무나 커서 때때로 날 당황케 할 때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그분을 향한 나의 경외감과 존경심을 반감시킬 수는 없다. ‘만유의 주재’라는 표현의 의미를 서서히 알아간다고 해야하나.

경험을 한다는 것은 참 의미있는 일이다. 다만 경험을 절대적인 가치로 판단의 기준을 삼는 자가 있다면 그 인생은 불행해 질 수 있다. 내가 지금 경험하고 느끼고 사유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들을 감사하게 수용하되 궁극적으로 그러한 경험적 사고의 틀이 나의 삶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들에 근거한 결정을 거부하기로 했다. 오직, 그의 사랑과 인치심을 신뢰함으로- 신앙의 틀(인도와 견인의 틀)만이 나의 삶을 좁고 곧은 길로 이끌 수 있음을 수용한다. 내가 어느 시간,공간적 상황에 위치할 지라도 그는 나를 놀랍게 사랑하고 계시지 않는가?

침례 요한을 생각한다. 경험에 근거하지 않고, 끓어오르는 세인의 기대에 부흥하지 않고, 묵묵히 광야의 외치는 소리와 주님의 길을 예비했던 아름다운 자. 그가 기쁨의 길을 걸어갈 때 얼마나 행복했을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 감을 깨달아가며 요한이 느꼈을 가공할 정도의 떨림이 공기를 진동한다.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어둑어둑해진 저녁,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렀을 찬양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 하다.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함께 얘기 나누며 참진리를 알아갔을 시간들을 상상해본다.

불의했던 헤롯왕 앞에서 당당히 참 정의를 선포하고 코 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올 때에 느낀 공포 속 결단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이 모든 장면들 속에 요한이 느꼈을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이 수용할 수 없는 그 놀라운 ‘기쁨’의 감정을 새발의 피 만큼이나마 본인이 느끼게 되고 있다면, 이 죄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가슴 끝에서 우러나온 회한의 깊은 감사를 드리는 것 뿐.